장터목에 도착하니 해거름이 되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대피소는 세석에서 넘어온 사람, 백무동쪽에서 올라온 사람, 중산리 쪽에서 올라온 사람으로 말 그대로 장터였다. 배가 고팠다. 서둘러 저녁밥을 준비했다. 옆 자리에는 60대 중반은 족히 돼 보이는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러웠다. 나도 저 나이에 지리산을 종주할 수 있을까?
지금도 함께 종주할 마땅한 친구가 없어 혼자 왔다. 저 나이에 함께 종주할 친구는 있을까? 소주가 달았다. 등산용 컵에 가득 따랐다. 단숨에 들이켰다. 술기운이 금 새 눈썹까지 올라왔다. 손전화기 번호를 콕콕 눌렀다. “여기는 지리산 장터목이야. 앞으로 더 잘 할게.” 술기운에 운적이 몇 번 있었다. 혼자서 몰래 울었다. 그러나 이번의 울음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민망한 울음이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반 아이들이 떠올랐다. 구구단을 열심히 외우던 모습이었다. 누런 코를 훌쩍이며 8단을 지지리도 못 외우던 내가 보였다. 아마도 그 때부터 수학하고는 담을 쌓은 것 같다. 6학년 때 반 아이들도 떠올랐다. 남학생들은 삽을 들고 잔디를 떴다. 여학생들은 세수 대야를 들고 남학생이 떠 준 떼를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다. 공부를 잘하고 품행이 음전한 여학생이 내 짝이 돼 잔디를 받았다. 가슴이 쿵쾅 댔다.
중학교 3학년 때 모습도 떠올랐다. 밤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한 후, 집에 가기 전 선생님과 함께 ‘어머님의 은혜’를 불렀다. 엄마 생각만 하면 그 때도 눈물이 났다. 속으로 어머님의 은혜를 불렀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났다. 50중반이 넘은 나이에 그만 ‘엄마!’ 하고 엉엉 울었다. 옆 자리의 노인들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엄마 그리는 눈물이 지리산을 덮어 버릴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점점 더 세차게 불어왔다. 오장육부에 낀 때를 씻는 기분이었다.
불화로와 냄비를 챙겼다. 설거지를 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휙휙 지나갔다. 학창시절 담배 골초였던 놈, 여학생 희롱하기 좋아하던 놈, 민중사에 나온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던 여드름이 덕지덕지 했던 놈, 내 하숙방에 여자 친구와 함께 들어와 음탕한 짖을 했던 놈, 하숙집 아래 여학생 집을 몰래 침입했다가 멱살 잡힌 놈, 미루나무 그늘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예쁜 여선생님, 어느 골목길로 나를 끌고 가 집단으로 폭행했던 놈들, ‘허벅지에 땀띠가 나도록 제발 공부 좀 하라.’고 모나미 볼펜으로 갱지 열두 장에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보낸 놈, 수학여행 때 같은 장소로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에게 내 주소를 뿌린 덕분에 ‘펜 팔’ 친구가 되었던 여학생 등등이 뒤죽박죽 섞여 주방 티슈에 닦여 나갔다.
대피소 방으로 들어서니 남자들만 있는 방에서 나는 야릇한 개 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훅하니 코끝에 와 닿았다. 담요 두 장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거나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딱 어깨 넓이만큼만 허용된 공간에 요를 펴고 누웠다. 죽어서 관속에 들어가는 것이 이럴까? 묘한 기분을 안고 까무륵 잠이 들었다. 코 고는 소리에 깼다. 옆 사람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푸우, 푸우, 푸우 세 번에 걸쳐 숨을 내 뿜었다. 그것도 내 귀에다 대고.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하늘엔 어린아이 덧니 같은 별들이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싸라기눈처럼 떨어질 기세로 떠 있었다.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도 떠 있었다. 둔중한 지리산 등성이 위로 하얀 달빛이 쏟아졌다. 지리산 빨치산과 국군 토벌대의 전투 장면이 떠올랐다. 솜 옷, 개기름 흐르는 머리털, 이와 서캐, 두려움에 떠는 눈빛, 살기등등한 눈빛, 포성소리, 죽음의 절규 소리 등등이 무당의 공수처럼 보이고 들려왔다. 지리산의 어두운 역사가 별빛 달빛 따라 내 속으로 쑤욱 들어왔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