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앙맞이 굿 거리를 진행하는 당골 박경자 |
자주 만나는 어느 법사(남자 무당)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림굿을 받는 무당은 많지만, 실제로 신이 내려 내림굿을 받는 무당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무당은 되었지만 굿을 할 줄 아는 무당은 없는 세상이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점집을 차려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 등쳐먹으며 사는 무당도 있다. 이마저도 못하는 무당은 야밤에 노래방 도우미로 전전하며 심지어 몸을 파는 경우도 있다.”고.
무업을 평생 업으로 여기며 남도 일대는 물론 서울까지 올라와 굿판의 장단과 사설 등을 가르치는 어느 원로 당골은 이렿게 말했다. “10년 전만해도 1 년에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굿판이 많았지만, 요즘에 1년에 많아야 2∼3건에 불과하다. 이제 무업으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숨짓는 만신의 뒷모습이 애처롭기 까지 했다.
날씨가 맑았다. 전날의 숙취가 조금 남아있었지만, 그런대로 맑은 날씨만큼은 아니지만 머리가 개운했다. 국립국악원에 도착해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신 후, 전남 진도에 있는 국립남도국악원행 버스에 올랐다. 국립남도국악원에서 개최하는 ‘해원의 굿, 삶의 예술’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버스 안에는 굿을 좋아하는 낮 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눈인사를 나눈 후 깊은 잠에 빠졌다. 일행은 늦은 오후를 지나 저녁 무렵 목적지에 도착했다. 약간 끈적거리며 덥덥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전화가 흔들렸다. 진도 소포리 김병철 민속예술전수관장이었다. “오셨소이잉. 나도 저녁 먹고 그리로 넘어 갈거요. 이따 보십시다잉..” 또 전화가 울렸다. 김오현 진도 씻김 굿 교수였다. “오셨소. 굿 판 일찍 끝내고 멋진 곳에서 굿 쟁이들과 한 판 합시다. 가슴에 깊은 정이 밀려왔다. 첫 날 밤에 진행될 당골 박경자와 진금순의 걸걸한 굿판에 대한 기대감으로 혈맥이 뛰고 정신이 유통했다.
학술대회 첫 날은 당골 진금순과 박경자의 굿판이었다. 신혼부부가 액을 물리치고 아들 딸 낳고 잘 살라고 축원하는 굿을 했다. 굿은 근원손, 덕물림, 지앙맞이, 지앙풀이, 손 굿, 잔 밥 맥이기, 제석 굿, 삼설양굿 순으로 진행 됐다.
근원손은 남녀가 부부의 인연 맺은 것에 대한 거리굿이다. 덕물림은 신행(新行)길이다. 새 애기를 처음 맞는 날 부정을 가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을 비는 거리다. 지앙맞이는 생명에 대한 간절한 소원풀이 거리다. 지앙풀이는 그 토록 기다리던 새 생명에 대한 소식이 있다는 거리다. 손 굿은 호환마마 등 질병을 달래 새 생명이 무탈하게 잘 자라도록 비는 거리다. 잔 밥 맥이기는 이 곳 저 곳 쓰다듬어 주는 할머니의 약손으로 부정을 물리치는 거리다. 제석굿은 가정의 안녕과 복락을 위해 제석님께 공을 들이는 거리다. 삼설양굿은 잡귀혼신 어르고 액을 풀어 무사태평한 삶을 비는 거리다.
당골 진금순(여)은 1943년 신안군 도초도 출신 세습무다. 22세에 장산도 무계집안 이충윤(1939년, 당시 26세)과 혼인했다. 25세 무렵 시할머니의 굿판을 따라가 고만 풀고 온 것이 자신의 첫 굿이었다고 한다. 2013년 신안씻김 굿이 전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유점자, 이귀인과 함께 예능보유자가 됐다.
박경자는 1931년 순천시 낙악읍 출신이다. 세습무로 28세에 무계집안 김순태(1928년, 당신 31세))와 혼인했다. 33세 무렵 무업에 입문하여 시가의 굿 문서를 학습했다. 순천과 여수 일원에서 폭넓게 활동해 오고 있다. 지금은 딸 김명이가 대를 잇고 있다.
모든 굿이 대대로 해 왔던 대로 진행됐다. 천상의 소리꾼 진금순은 특유의 신명으로 굿판을 이끌어 갔다. 인자한 할머니 같은 당골 박경자는 구수한 문서로 관객들의 맘을 사로잡았다. 어느 신혼부부는 당골 박경자 앞에서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굿을 받았다. 어떤 이는 무릎이 아프다며 잔 밥 맥이기 굿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굿은 말 그대로 모두가 하나 되어 해원하는 굿판이었다.
그런데 당골 박경자 딸 김명이가 주관한 삼설양굿 모습이 이상했다. 그것은 굿이 아니라, 마당극이었다. 무당은 온 데 간 데 없고, 무대 위의 희극 배우만 있었다. 그 것도 객석의 관객들이 억지로 주머니를 풀도록 보채는 얼굴 붉히는 모습이었다. 희극으로서도 수준이 높으면 봐 줄만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시골 아줌마들의 막 춤 수준의 희극이었다. 굿이 변질돼도 너무 변질돼 가고 있었다. 김오현 교수가 말했다. “모든 당골들이 욕먹겠소. 이건 아닌 것 같소. 해도 어지 간 해야지...” ‘굿’이 ‘궂은 일’로 돼가고 있었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