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조선(문소영 지음, 나남출판사, 444페이지, 1만 8000원)
<못난 조선>의 저자 문소영 씨는 신문기자를 거쳐 논설위원을 맡고 있다. 기자와 데스크(부장)를 거쳐 논설위원이 되면 아는 게 그렇게 많아지는 건지, 저자가 특별히 아는 게 많은 건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조선 중기의 동아시아 역사를 중심으로 삼국시대, 고려, 대한제국, 현재의 대한민국까지를 섭렵하며 쉴 새 없이 토해내는 문제적 지적들에 머리가 지끈지끈할 지경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못난 조선’은 결국 ‘못난 조선의 지도층, 양반’들이다. 그런데 저자의 집안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유수의 명문가였고 증조할아버지 우당(憂堂) 문형모 선생께서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삼대를 말아먹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뼈대 있는 가문이다.
그럼 저자는 자신의 조상님들을 향해 ‘못났다’고 손가락질을 한다는 논리인데 사실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국제 강국 조선’을 위한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진한 ‘안타까움’이 ‘못난 조선’에 실렸을 뿐이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문호개방이 이뤄지던 1800년대 일본과 조선의 개항은 불과 23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23년 이후로도 30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 이유를 저자는 문호 개방 이전의 16-18세기 중국, 일본, 조선 리더들(지배층)의 역량차이로 벌어진 국력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 진단을 위해 16-18세기 삼국과 세계정세의 도처를 마구마구 파헤쳤다.
중국의 차이나(China)는 영어로 ‘도자기’라는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일본의 재팬(Japan)은 ‘옻칠’이라는 보통명사로도 쓰인다. 대한민국의 코리아(Korea)는 다른 뜻의 보통명사가 없다. 이는 한 때 중국은 도자기로, 일본은 칠기로 유럽을 뒤흔들었다는 반증인데 ‘꼬레아’는 그런 적이 없었다는 의미다.
자기는 특히 1300도의 고온에서 흙을 쇠처럼 구워내는 기술이다. 16세기까지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 중국, 베트남뿐이었다. 당시의 자기 생산 기술은 지금의 반도체에 버금갈 신기술이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도공들을 납치해 가면서 그 기술을 확보했다. 그런데 일본은 은(銀) 에 이어 화려한 채색 자기와 우키요에 판화로 유럽의 경제, 문화, 예술에 자포니즘(Japonism)이란 단어까지 만들어 질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
그 유명한 모네, 르누와르, 고흐, 고갱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 역시 청나라 들어 신대륙으로 인해 발전을 거듭한 유럽에 스멀스멀 역전 당하기 전까지는 세계 최강의 인구, 기술, 재력을 가진 나라였다.
중국과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그렇게 뛰고 있을 때 조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유럽에 ‘은둔의 나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스스로 자신을 은둔시킨, 완벽한 ‘우물 안 개구리’였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개구리를 냄비의 찬물에 넣고 물을 서서히 데우기 시작하면 개구리는 물의 온도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삶아져 죽는다고 한다. 직접 체험해 보지 않아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은 하여튼 데워지는 우물 속에서 그렇게 삶아져 일본에게 먹혔다.
15세기 일본은 벌써 포루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과 교역하면서 유럽의 ‘정보 찌라시’를 막부의 손에 넣고 있었다. 19세기 개화기 때와 마찬가지로 그때도 청년들을 로마와 유럽에 파견했다.
세계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카톨릭을 받아들였고, 세계 무역을 중시했다. 물론 이후에 카톨릭 금지와 쇄국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가사키 항의 인공섬 데지마는 네덜란드에게 열어두었다.
조선은 상업과 무역을 무시했고 세계에 대해 무심했다. 그런데 우리가 안타까운 것은 신라의 장보고, 백제의 사비성, 고려의 벽란도는 국제무역의 대명사였다. 코리아의 ‘꼬레아’는 그때 아랍 상인들에게 알려졌던 우리나라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아랍인들의 발길이 조선에 들어서면서 뚝 끊겨 버렸던 것이고, 조선은 그때부터 우물 속에 들어앉았던 것이다. 하물며 유럽의 신문화까지 더해진 청나라 150년의 전성기 때도 그들의 선진문물을 차단하는 대신 이미 망하고 없는 ‘명나라’만 애타게 부르짖을 뿐이었다. 그러다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청나라의 허실이 드러난 그 때는 또 오직 청나라만 쳐다보는 안타까운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일본이 포루투갈로부터 조총을 도입하고도 약 100년쯤 후에 네덜란드 하멜 일행 36 명이 제주도에 표류했다. ‘내부 정치용’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 때다. 이들은 ‘13년 28일’을 조선에 붙잡혀 있었다.
총포도 가지고 있었다. 1년 정도 수도 한성에 있었지만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한 양반 댁들의 초대가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유배돼서 ‘풀 뽑기, 화살 줍기, 새끼줄 꼬기’나 하다 배를 구해 일본으로 탈출한다.
조선은 13년 동안 하멜로부터 유럽에 대해 알아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대국(중국), 왜국(일본), 양국(서양) 이렇게 세 나라만 알 뿐이었다. 1889년 황해도 관찰사도 그랬다. 그런데 일본의 끝자락 어느 섬에 도착한 하멜은 유창한 통역을 대동한 한낱 지방관리가 던지는 수십 문항의 질문에 답해야 했다.
조선은 ‘15% 양반’의 기득권을 철저하게 지켜주는 나라였다. 로마의 귀족들이 병역, 납세, 공공기부(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철저했던 반면 조선의 양반들은 군역, 납세, 노동 어느 하나도 책임지지 않았다.
50%의 양인과 35%의 노비들이 그 몫을 대신했을 뿐이다. 천한 상업에 양반이 종사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됐다. 그러나 일본은 900년대에 이미 노비제를 공식 폐지했고 1600년대에는 지배자인 막부(쇼군)가 나서서 상업과 무역을 장려했다. 현재 1500년 이상 된 장수기업 1-3위가 일본 기업이고 4위가 독일 와인회사다.
오로지 명나라와 주자학(성리학)에 ‘몰빵’ 하면서 죽은 왕의 장례가 1년이냐, 3년이냐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을 만큼 섬세(디테일)했던 조선은 1910년 결국 일본에게 먹히고 말았다. 이때의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청나라, 러시아와 싸워 이기고 미국, 영국과 타협할 만큼 이미 국제화된 강국이었다.
마지막 안타까운 사실 하나 더 있다. 하멜 표류기에 조선이 북위 34도-44도 사이에 존재한다고 적힌 이후 ‘은둔의 나라’와 직접 교역을 하기 위해 1699년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 나섰던 인도네시아 바티비아 주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1천 톤 급 상선 ‘코레아호’는 일본의 교묘한 방해와 데지마 상관을 폐쇄하겠다는 압력으로 제주도나 부산, 해남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 가고 말았다. 물론 찾았다 해도 조선이 네덜란드와 직접 교역에 나섰을 지는 모를 일이지만.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순과 부조리한 상황을 하나하나 조선의 역사에 대비시키면서 16-18세기 헛발질이 재연되지 않도록 지도층과 국민들의 각성, 각성을 부르짖는다.
‘강한 나라’가 돼서 세계를 위해 경제, 군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우리도 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최보기 북컬럼니스트(thebex@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