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전경 |
삭정이처럼 마른 손을 흔들며 군문(軍門)으로 바래다 준 엄마를 뒤로하고 시작한 군 생활이 연시매최(年矢每催)처럼 흘러 32년이 되었다. 시골 촌놈이 국군기무사령부 대령까지 올라 군문을 떠났으니,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자부심도 든다.
대한민국 국회라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분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솔직히 두렵고 긴장되지만, 한편으론 달뜨고 설레이기도 했다. 새롭다는 것이 언제나 그렇 듯이.
터질 것 같은 긴장을 풀기 위해 무작정 떠났다. 떠남은 또 다른 편함을 주기 때문에 떠났다. 목포였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홍도․흑산도 행 배를 탔다. 푸르다 못해 검은 바닷길을 울렁이며 갔다. 섬에 도착하니 손금 같은 고샅길을 통로로 어깨를 포갠 민박집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었다.
경기도 평택 출신 아줌마가 하는 ‘경기 집’에 여장을 풀고 산 중턱을 깎아 만든 산책로를 발밤발밤 걸었다. 질렀다. 바다를 바라보며 목청껏 진도 아리랑을 질렀다. 세마치장단이 귀속에서 윙윙 대며 박을 맞췄다. 수평선 끝에는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속의 궁녀 같은 佳人들이 춤을 췄다. 응어리진 것들이 풀어지며 새로운 희망을 잉태했다.
사철가를 불렀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봄아 갈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고 여름이 되니 녹음방초 성화시라...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 오니 한로삭풍 요란해도.. 황국 단풍은 어떠 헐고...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 오니... 천지가 백(白)하니 모두가 벗이로구나...' 그랬다. 세상사 모두 끝끄트리에다가 대랑 매달아 놓고 거드렁 거리며 놀고 싶었다.
애저녁이 돼 주린 창자에 술을 붓고 몽돌이 너부러져 있는 바닷가로 갔다. 꼴깍 해가 너머 갔다. 마치 이태백이 강에 빠진 달을 건지는 심정으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피안과 바라밀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배 타고 홍도를 돌았다. 버스타고 흑산도를 돌았다. 손암 정약전 선생이 손짓하고 계셨다. 자산어보 속 물고기들이 뛰어 놀며 그렇게 억만 겁을 희롱하고 있었다. 저녁 때가 돼 목포에 도착했다. 유달산을 올랐다. 이난영 노래비 앞에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목포의 눈물’은 한국 가요 트롯트의 시발(始發)이자, 일제에 항거한 민족의 노래이다. 2절 가사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는 삼백년 前 임진왜란(정확히는 정유재란) 당시 노적봉을 군량미로 위장시켜 왜군을 무찌른 이순신 장군의 영험을 기도한 노래인 것이다.
일제가 시비 걸자 ‘삼백연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이라고 해명했다. 삼백연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연못 이름이며, 원안풍은 해석이 안되는 뜻이다. 한 여인의 질곡있는 삶과 민족의 혼이 함께 서려 있어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노래방에서 불리는 불후의 명작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삼경이 이슥하여 용산역에 도착했다. 기온이 뚝 떨어져 있었다. 피곤이 엄습해 왔다. 대충 짐 정리해 놓고 똑 떨어져 자고 나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출근 길 강변북로엔 진한 여행의 여운과 향기가 깔려 있었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그냥 또 떠나 볼 일이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