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군 생활을 하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주민등록지만 스물두 번 옮겼다. 강원도 화천으로부터 경남 진해에 이르기까지, 전북 전주에서 경북 대구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으로 누비며 다녔다. 가는 곳 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고 멋이 있었다. 내가 직접 살면서 겪어 본 고장 중에서 ‘또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 온다면 나는 단연코 엄지손가락을 힘 있게 펴 보이며 남도를 꼽는다.
남도에 가면 맛과 멋이 있다. 남도엔 다른 고장에서 볼 수 없는 민속예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누군가 ‘소리는 호남이요, 춤은 영남이다.’라고 했지만, 나는 소리와 춤이 모두 발달한 곳이 호남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도엔 사람을 끄는 이상한 뭔가가 있다. 말부터 ‘그~으~라~제~이~잉...’하며 척 감기는 정감으로 사람을 잡아 당겨 놓고 시작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답사 일번지로 남도를 꼽았듯이, 남도에 가면 우리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두 담긴 기층문화를 만날 수 있다. 남도를 아무리 많이 가 보아도 남도를 다 말 할 수 없다. 남도에 살아도 남도를 다 말할 수 없다.
이번 이야기는 여러 해 동안 민속예술과 문화재를 중심으로 남도 일대를 여행한 내용이다. 어느 봄 날 청산도를 방문해 하얗게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인연의 법칙을 생각했다. 구례에서는 판소리 동편제를 만나 선 굵은 소리의 세계를 배웠다. 순천에서는 뒷간이 가장 아름다운 절 선암사에서 가슴속 응어리를 달랬다. 벌교읍을 찾아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 주인공들과 대화도 나눴다.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엔 홍도와 흑산도를 찾아 맘속의 ‘전투복’을 벗어 던졌다. 목포 유달산에서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만나 민족혼을 목 놓아 부르기도 했다. 누런 가을볕이 내리던 가을 날 해남 땅 끝에서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초의 선사, 송강 정철 등 제현님들을 역사책속에서 모시고 나와, 인생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응석 부리기도 했다. 여기, 그런 남도의 희한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본다. 이번 여름휴가 때 가족과 함께 찾아 볼만한 여행 정보가 되길 아소망해 본다.
♦청산도 연가
풍류당비(나는 봄비를 풍류당비라고 한다) 내리는 서울을 빠져 나오는 맘은 꽃향기로 가득 찼다. 중화 참(中火 참)이 한 참 지나 완도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청산도행 배에 오르니 꽃잎을 흩뿌린 듯 섬들이 바다 위에 점점이 펼쳐졌다. 조금은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진도 아리랑'을 흥얼대다 보니 배는 청산도 선착장에 선수를 들이댔다. 해가 두 뼘 정도 남아 있었다.
청산도는 전남 완도군 청산면으로써 완도군의 1,004개 섬 중 하나다. 섬에서 시간이 멈춘 듯 묘한 분위기가 엄습해 왔다. 어둡기 전 서둘러 남도 장례문화 특징 중 하나인 초분(草墳 :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땅에 묻지 않고 시신의 물이 빠질 때까지 임시로 만들어 놓은 무덤)을 둘러보았다. 초분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육신의 허망함이 밀려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숙소가 마련돼 있는 마을 고샅을 걸었다. 마을 사람도 답사 객도 없는 고샅엔 개 짖는 소리만이 가끔 들렸다. 초분의 허망이 또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캐낸 돌로 쌓아 만든 돌담위엔 갓 돌 지난 아이의 앞니 같은 별들이 은하수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희한한 아름다움이 까만 어둠속에 깔리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돌담길을 더듬거리며 걸었다. 희락정, 주왕암, 협동조합 가게, 졸고 있는 가로등,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곰삭은 섬마을 향기가 풍겨왔다. 꼬막 속 핏줄 같은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맘이 편해졌다. 서울에 두고 온 근심덩어리들이 달려오다간 도망치고, 도망갔다간 또다시 다가왔다. 청산도의 밤은 그렇게 어린아이 잠처럼 깊어 갔다.
청산도 아침은 옥색이었다. 해송 너머 해변 가에 이르는 길옆엔 옥색 햇살을 등지고 老부부가 마늘밭을 가꾸고 있었다. 기품 있는 해송들이 뿌리를 내린 작고 좁은 자드락길을 걸었다. 새벽녘 자리끼 마실 때나 느낄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이 가슴속에 강물처럼 흘렀다.
청산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농업문화유산 제1호인 '구들장 논'이었다. 자투리 땅뙈기 하나라도 놀리지 않기 위해 돌 땅 위에 구들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진흙을 덮어 만든 논이었다. 구들장 논바닥엔 가난, 한숨, 핍박, 설움, 얼룩, 눈물 등 온갖 시련이 켜켜이 싸인 거름되어 도전, 극복, 이룸, 나눔, 베 품, 신명, 희망 등 이 세상 모든 사랑을 피워내는 것 같았다. 박제된 문화가 아니라 생활 속에 온전히 살아 숨을 쉬는 문화유산인 것이다.
서편제 영화 길은 고왔다. 임권택 감독이 "서편제는 귀신이 도와 줘서 성공한 영화다. 그 길 위로 회오리바람이 불어 주었기 때문에 명장면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 그 길을 걸으며 진도아리랑을 영화 속 유봉처럼 질러댔다.
‘문경 세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내 가슴엔 희망도 많다. 만나니 반가우나 이별을 어이해 이별을 헐랴거든 왜 만났든고. 약산동대 진달래 꽃 한 송이만 피어도 모두 따라 핀다. 춥냐 덥냐 내 품안으로 들어라 베개가 높고 낮거든 내 팔을 베거라.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나 가세. 해당화 한송이 와자자지끈 꺽어 우리님 머리위에다 꼿아나 줄까. 치어다 보느냐 만학은 천봉 내려 굽어보니 백사지로구나. 왜 왔든고 왜 왔든고 울고나 갈 길을 내가 왜 와든고. 만경창파에 둥둥둥 뜬 배 어기여차 어야디어라 노를 저어라.’
진도 아리랑엔, 신명 속의 한으로 구성된 내용 따라, 시김새와 꺽임이 많은 남도 민요 특징이 오롯이 들어 있다. 소리길 위로 어깨춤이 덩실대며 뿌려졌다. 일본인 답사 객들도 흥에 겨워 손끝 따라 춤사위를 만들었다. 양귀비 꽃 보다 더 고운 진도 아리랑 사랑이 서편제를 넘어가고 있었다. 청산도를 빠져 나오는 뱃길은 피안의 세계였다. 무릎 위에 청산도 사랑을 올려놓고 세마치장단을 쳤다. 육자배기가 진한 여운을 남기며 뱃고동과 함께 울렸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