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그 위세가 자못 웅장하여 방문자의 기를 압도한다. 창덕궁은 화려하고 찬란해 촌티 나는 나 같은 시골뜨기는 돈화문 근처만 가도 오금이 저린다. 하지만 덕수궁은 편하다. 정문인 대한문은 적당한 높이와 넓이로 찾는 이의 마음을 엄마처럼 안아주고, 정전인 중화전은 콧수염이 멋진 인자한 아버지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줘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덕수궁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전각이 두 개 있다. 석어당과 정관헌이 그 것이다. 석어당은 선조대왕께서 임진왜란 후 경복궁이 불에 타 마땅하게 기거할 곳이 없게 되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사용하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게 되어 '옛 임금님이 거처했던 집'이란 뜻으로 석어당(昔御堂)이란 당호를 붙였다. 헬쓱한 얼굴로 와 닿는 석어당에서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얼굴을 본다
정관헌은 고종황제께서 외국 사신을 접견하시고 가배(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던 러시아 풍 건물이다. 비가 오는 날 대한문에서 정관헌에 이르는 마사토 깔린 작고 하얀 길을 혼자 걷다 보면 마음까지 하얗게 된다. 하얀 맘을 안고 걷다 정관헌 뜰에 비 맞고 서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면, 불현듯 잊고 지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첫 사랑, 어느 스님 등 내 가슴에 똬리 튼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자맥질한다.
이렇게 고즈넉하게 아름다운 정관헌에서는 매년 5월부터 9월말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덕수궁 풍류’라는 국악 행사가 전문인들에 의해 무료로 열린다. 출연진 모두가 인간문화재급 분들이며 1시간 동안 판소리, 민요, 춤 등 각각 다른 세 부문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 무대에 올린다.
정관헌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 옛날 마당에서 모두가 함께 어울렸던 것처럼 광대와 관객이 하나가 돼 소리하고 춤추고 웃는다. 말 그대로의 굿판이 벌어진다. 황제께서 노닐던 곳에서 백성들이 황제가 돼 흐드러지게 춤추며 우리 것 즐기는 ‘덕수궁 풍류’가 있어 세상 살 맛나게 한다. 이번 주 목요일 당장 사랑하는 사람과 덕수궁 돌담길 돌아 정관헌을 가보는 것도 좋을 성 싶다. 녹음방초 우거진 덕수궁에서 여름밤 풍류를 즐기는 호사한 번 누리고 싶지 않은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은 협률사(協律社)다. 1902년 고종 재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금의 광화문 새문안 교회 자리에 2층 500석 규모로 지었다. 전국의 유명한 판소리 명창과 가기(歌妓), 무동(舞童) 등 170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만든 뒤 관급을 지급했다. 잠시 일제의 사교장으로 운영됐다가 폐지된 후 1908년 원각사로 다시 문을 열었다.
정동극장. 정부에서는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1995년 서울시 중구 정동 길 43에 국립극장 분관으로 정동극장을 세웠다. 이후 1997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4시 8시 2회에 걸쳐 전통예술을 공연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찾는 1번지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연인과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인 정동 길을 걸으며 정동극장에서 우리의 전통예술을 관람한다면 이 시대 최고의 풍류객이 될 것이다.
민속극장 ‘풍류’와 ‘한국문화의 집’.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전통예술 전문극장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해 있다. ‘풍류’에서는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상설 공연을 열고 있고, 매년 4~5월 인간문화재들이 출연하는 중요무형문화재 공연을 기획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한국문화의 집’에서는 전통 춤을 주 상품으로 매주 수요일 상설 공연을 열고 있다. 진옥섭이라는 걸출한 예술 감독이 진행하는 전통예술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현란한 공연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진옥섭 감독의 특허상품 ‘풍류로드’는 풍류의 맛과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문화 여행이다.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국립국악원 우면당. 예술의 전당 서쪽에 위치해 있다. 연 중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전통 예술을 종목별로 묶어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 초등학생으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것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공연료도 만원 미만으로 온 가족이 주말을 부담 없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남산 국악당. 남산 한옥마을에 위치해 있다. 전통예술 전문인들이 대관 공연을 하거나 발표회를 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극장이다. 연간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공연이 있다. 공연 보기 전 극장 앞 전통 찻집에서 따뜻한 차로 속을 덥히는 것도 별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