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風流)란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멋지게 사는 것 중 하나가 풍경 있는 집에서 풍류를 즐기며 사는 게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운치 있는 집이라면 단연코 강릉 선교장이다. 선교장은 한국의 정원문화전문가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은 바 있다. 아마도 이런 선교장에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을 사는 사람 중 한명일 것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 11대 손 이내번이 지은 집이다. 큰 사랑채 열화당, 작은사랑, 행랑채, 연지당, 동별당, 안채, 안사랑 채, 활래정, 서별당 등 건물 10동에 총 120여 칸 규모다. 가히 민간 궁궐이라 할 만 하다.
선교장(船橋莊)은 우리말로 배다리 집이다. 경포호수에서 집까지 배로 다리를 만들어 드나들었다 해서 선교장이라고 불렀다 한다. 선교장의 특징은 건물구조와 풍수적 내용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건물구조적 측면이다.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은 대문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 멋스러움이 있으면서도 가슴으로 안방 아랫목 같은 따뜻함이 느껴질 때 성립한다.
대문 이름이 월하문(月下門)이다. 양옆 기둥에 '조숙지변수 (鳥宿池邊樹 : 새들은 연못가 나무에 잠들고), 승고월하문(僧鼓月下門 : 스님은 달빛 아래 대문을 두드린다.)이란 시가 걸려 있다. 이 글은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것이다. 원고 내용을 고치는 것을 퇴고(堆鼓)라 한다. 가도가 윗글을 지으면서 승고월하문의 '고'자를 '퇴'로 할까 '고'로 할까 망설였다. 지나가던 당대 최고의 시인 한유가 '고'자로 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승고월하문이 되었다. 글 쓸때의 퇴고란 말이 여기서 유래한다.
애저녁 무렵 새들이 연못가 나무에 잠들려고 찾아들 때 스님 한분이 달빛을 등지고 편안한 맘으로 대문을 두드리는 참 만만한 집인 것이다. 정말로 대문의 크기가 결코 당당하지 않고 온유하다. 높이와 폭이 아버지 두루마기 폭처럼 포근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가진 것 없고 빽없는 민중들도 이 집을 편하게 들고 날 수 있었다.
다음은 활래정(活來亭)이란 정자다. 얼핏 보면 ㄱ자 형의 정자로 보이나, 구조는 두 채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결구도 지붕도 각각 형성되어 있다. 이런 쌍정(雙亭)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렵다고 한다. 이곳엔 시인묵객은 물론 당대의 쟁쟁한 고수들의 흔적이 많다.
조선 헌종 때 명문장가로 유명했던 영의정 운선 조인영, 흥선 대원군,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성재 이시영 등의 시서화가 즐비하다. 특히 몽양 여운형은 활래정의 단골 손님이었는데, 이 집안에서 선교장 옆에다 세운 동진학교에서 1년간 영어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꽃잎 분분히 날리는 봄, 녹음방초 우거진 여름, 만산홍엽의 가을, 백설 펄펄 날리는 겨울을 이 곳 활래정에 앉아 맘껏 희롱하고 싶은 충동이 저절로 드는 우리나라 풍류 제일 정자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루(樓)와 정(亭)을 구분해 보자. 광한루(廣寒樓)할 때 루(樓)는 공공의 재산이라는 뜻이고, 활래정(活來亭)할 때 정(亭)은 개인소유란 뜻이다. 그러니까 루(樓)는 나라의 정자인 것이며, 정(亭)은 개인의 정자인 게다.
다음은 안대문이다. 안대문을 남자와 손님들만 드나는 선교유거(仙嶠幽居)란 이름의 솟을대문으로 만들어 놓았고, 여자들만 드나들수 있는 평대문에 내외벽을 설치해 여자들의 불편을 최소화 한 것이 이채롭다. 이집의 큰 사랑채가 열화당(悅話堂)이다. '즐겁게 이야기하는 집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유교적인 가치관이나 윤리관이 담긴 내용인데 반하여 지극히 인간적인 주제의 사랑채다. 엄숙함과 긴장감을 찾아 볼 수 없는 편안한 사랑방이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렁 더울렁 담소 나누기 딱 좋은 곳이다.
선교장은 전체적으로 풍류가 배어 있다. 대관령 동쪽은 선가(仙家)의 기품이 있다. 대관령이란 높은 고개가 속세의 먼지를 막아주고, 동해의 푸른 물결을 거칠 것 없이 바라보는 곳이 강릉이다. 이러한 강릉지역 특유의 선가풍류가 흐르는 집안 곳곳엔 풍수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우선 이내번이 집 터를 잡을 때 한 떼의 족제비들이 나타나 일렬로 무리를 지어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광경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그 족제비들을 따라 가보니 지금의 선교장 터로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이내번이 여기에다 집터를 잡았다.
우리나라엔 동물과 관련된 명당터가 많다. 경북 영양의 조지훈 생가인 호은종택도 매를 날려 잡은 터라고 전한다. 단종의 묘 장릉 터도 노루와 관련된 터다. 동물들은 인간보다 본능과 감각이 훨씬 발달해 있다. 동물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곳은 대개가 명당이다. 족제비들이 무리지어 살던 선교장 터도 풍수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명당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췄다.
다음은 풍수전문가 조용헌 교수가 설명하는 선교장 관련 풍수해설이다. ‘대관령에서 동해 쪽으로 내려온 산세의 한 가닥이 오죽헌 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가 시루봉으로 솟았다. 시루봉에서 일차 뭉친 맥은 경포대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개의 자그마한 내청룡과 내백호를 분화해 놓았다. 이 내청룡과 내백호는 흡사 알파벳의 U자 모양 같다. U자 가운데에 들어서면 아늑하고 편안하다. 시루봉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의 고찰 인월사 터에서 끝나기까지 약 4㎞에 걸쳐 이러한 U자 모양이 형성돼 있다. 산세도 200M내외로 높지 않아서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고 주변에 날카롭게 솟은 암산도 보이지 않아서 강렬한 살기(殺氣)가 눈에 띄지 않는다. 문사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터다.'
이런 곳에 정남향에서 약간 서쪽으로 틀어서 집 방향을 앉혔다. 이를 간좌(艮座)라 하는 데 발복이 빠르다. 그럼 단순히 발복을 빠르게 하기 위해 간좌로 집을 앉혔을까? 그렇치 않다. 좌청룡과 우백호 사이의 틈 간격을 수구(水口)라 한다. 이 수구가 넓으면 여자가 양다리를 벌리고 있는 것과 같아서 좋지 않다고 한다. 기가 빠져 나가서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수구는 닫혀 있어야 좋다.
선교장을 간좌로 함으로써 내백호가 안쪽으로 쑥들어 온다. 수구가 좁아진 것이다. 그래서 정남향인 자좌(子座)나 임좌(壬座)로 하지 않고 간좌로 한 것이다. 90년대 강릉시에서 민속자료 전시관을 신축하면서 선교장의 내백호에 해당하는 지세를 훼손했다. 이를 안 선교장 14대 종부 성기회 여사가 당국에 항의하자 시에서 돌백호(호랑이 상)를 설치했다. 훼손된 백호의 기를 보강하기 위한 전형적인 풍수학의 비보(裨補)인 것이다.
풍수원리와 봉롯방 같은 인간미 넘치는 건물구조, 선가의 유풍이 슴배어 있는 선교장. 집 뒤로 수백년 된 금강송 군락이 성주신이 돼 주고, 집 앞 홍연의 연향이 그윽한 이곳에서 신선처럼 앉아 거문고 청치며 소요유하는 풍류객이 되고 싶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