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 |
부임한 날 저녁, 해주 감영 선화당 안채에서 서책을 들이다 보고 있던 이이가 시중들 기생이 문안을 올린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주안상을 든 관비 뒤로 숯같이 까만 머릿결, 빙설 같은 하얀 피부, 초생 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막 피어난 꽃 같은 동기(童妓) 유지(柳枝)가 서 있었다.
이이의 가슴은 뛰었다. 그러나 어린 동기와의 호합(互合)은 금수(禽獸)와 같은 짓이라 생각했다. 동기(童妓) 유지(柳枝)에게 수종(隨從)만 들게 했다. 이이는 그 날 유지와 호합(互合)하지 않은 채 관찰사 소임을 마쳤다. 그 후 세 번의 만남이 있었다. 마지막 만남이 있던 날 이불만 따로 하고 나란히 누워서 밤을 새웠다.
그리고 다음해 이이는 4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내세가 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면 장차 부용성(芙蓉星)에 가서 너를(柳枝) 만나리” 율곡 이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생각하며, 지난밤 숙취로 무거운 머리를 들어 진저리를 칠 즈음, 차는 강릉 오죽헌(烏竹軒) 주차장에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오죽헌 뒤뜰 까만 대나무 숲에 겨울이 내려앉고 있었다. 가을이 저만치 떠나버린 자리엔 바싹 마른 가랑잎이 떨어져 이이가 부임하던 날처럼 겨울 안개비에 쓸쓸히 젖고 있었다.
오죽헌은 14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지어진 건물로써, 당시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별당이다. 조선시대 사회적 특징 중 하나가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인데, 이 오죽헌도 최응현이 이름 미상 딸에게 물려주었고, 다시 그녀가 딸 신사임당에게 상속했다. 율곡 이이가 여기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이 오죽헌을 넷째 딸에게 물려주었다. 넷째 사위 권처균은 집 주위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많은 것에 착안하여 집 이름을 까마귀 오(烏)를 써 오죽헌(烏竹軒)이라 했다.
오죽헌엔 정조대왕의 이이 찬양 친필 벼루를 보관한 어제각(御製閣), 신사임당이 즐겨 그렸다는 수령 600년 된 율곡매(栗谷梅), 박정희 前 대통령의 친필 편액이 걸린 문성사(文成祠) 등 역사적 유물이 많다.
그런데 문성사가 깡마른 얼굴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둥이 금강송이 아니라 시멘트로 돼 있는 것이다. 오죽헌의 모든 고택이 이 시멘트 기둥으로 인해 그 품위를 잃고 상처 받고 있었다.
함께 간 역사학자 이 교수님께 질문했다. “정부가 하는 짓이 이 모양 이 꼴이라니깐요. 강릉 주변에 금강송이 천지 빼깔로 깔려 있는 데 시멘트 기둥을 세우다니요.”
이 교수님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문성사 건립 당시 정부에서는 산림녹화 사업이 국가 시책이었습니다. 박정희 前 대통령이 문성사 건립을 위해 금강송을 베겠다는 보고를 받고는 ‘내 친필이 걸린 건물이라고 해서 산림녹화 정책 원칙을 깰 수 없으니 시멘트로 하라. 먼 훗날 우리들이 심은 나무가 장성하면 그 때 베어 다시 건물을 지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문성사가 다시 보였다. 깡마른 얼굴이 아니라, 불필요한 지방질이 빠져 버린 건강한 얼굴이었다. 시멘트 기둥도 다시 보였다 흉물스러운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를 두 눈 부릅뜨고 지키는 금강역사였다.
간밤의 숙취가 깼다. 속쓰림도 단박에 없어졌다. 경포대로 갔다. 경포대 바닷빛이 그렇게 푸를 수 가 없었다.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가 내 가슴속에 낀 미혹의 때를 씻어 주었다.
‘국곡투식하는 놈과, 부모불효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나머지 벗님네와 서로 모아 앉아서, 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 거리며 놀아 보세. 더질더질.’ 중모리 장단에 맞춘 사철가 끝 대목이 바닷바람 타고 대관령을 힘차게 너머가고 있었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