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늦봄 지자체 선거가 있었다. 마을이장이 마을회관에 모여있는 동네 어른들에게 물었다. “어르신들 이번 군수선거에 나온 사람에게 뭘 해달라고 할까요?” 이장은 ‘다리를 놔 달라고 하거나, 마을길 포장을 요구하겠지.’하는 생각을 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30여 분 후 답이 돌아왔다. “소리를 원없이 듣고 싶네.” 커억하며 이장 목젖너머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왔다. 눈시울이 불거졌다. 벚꽃이 분분히 날렸다. 걸군 농악이, 베틀노래가, 명 다리 굿이, 닻배 노래가 이명(耳鳴)처럼 울려 왔다.
그해 여름 왕기철, 왕기석 형제 국악인이 소포리를 찾았다. 평소 친분있던 이장부탁을 받고 희사(喜捨)판을 연 것이다. 마을회관 앞 마당에 온 주민이 모였다. 판소리 심청가와 수궁가가 완창으로 불려졌다. 추임새가 나왔다. 그냥 박(拍) 끝에 나오는 구색 맞추기식 얼씨구 추임새가 아니라, 심청이 인당수 빠지는 대목에선 ‘쯔쯧’하는 식으로 이면(裏面)에 맞는 추임새가 나왔다. 200여 명의 주민들이 어린아이 덧니 같은 초롱한 모습으로 몇시간을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켰다.
‘사이다 병 흔드는 데 지가 김 안생기고 배겨?’ 하듯 굿판에 가득찬 흥은 어느새 동네 주민들의 혈관속에 앙금돼 있던 신명을 건드렸다. 극심한 허기를 느꼈던 소리가 뽀글거리며 올라왔다. 마을 소리꾼 주동기와 그의 아들, 그의 손자 삼대가 소리를 했다. 무대판이 마당판으로 변했다. 수십년간 움추렸던 풍류가 바다 너머 웃녁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포리를 방문한 내외국인 사진을 민속전수관에 전시해 놓은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