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개발부터 보안·게임·포털까지…포기를 모르는 젊은 CEO
[편집자] 이 기사는 6월16일 오후 7시50분 뉴스핌의 프리미엄 뉴스 안다(ANDA)에서 표출한 기사입니다.
[뉴스핌=이수호 기자] 최근 벤처열풍이 다시 거세게 불고 있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창업,벤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2 스티브잡스'와 '마윈'을 꿈꾸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과거 벤처창업에 성공한 국내 전통 벤처기업가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90년대 초반 IT업계에 뛰어들어 자산 770억원 규모의 이스트소프트를 일궈낸 김장중 대표가 대표적이다.
김장중 이스트소프트 대표(44)가 본격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든 것은 IT 붐이 한창이던 1990년대 초반이다. 당시 한양대학교 수학과 2학년 시절, 그는 문서 작업 중심의 워드프로세서에 길이 있을 것이라 여겼고 당대 굴지의 대기업인 현대전자로부터 상품화 제안을 받을 정도로 IT 업계에서는 능력있는 학생으로 명성을 떨쳤다.
더욱이 당시는 벤처 붐이 한창인 시기였다. 그가 대학 시절 개발한 문서작업 소프트웨어 '21세기'는 개발 초창기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훗날 그가 국내 IT 업계에서는 드물게 보안과 게임, 포털사업까지 주도하고 있는 팔방미인형 CEO로 거듭나는데 밑거름이 됐다.
'21세기' 개발 이후 이스트소프트를 창업한 그는 압축프로그램인 알집을 통해 스타 개발자로 우뚝 섰다. 그 이후에도 그래픽뷰어 '알씨', 보안프로그램 '알약', 포털사이트 '줌닷컴', 온라인게임 '카발' 등을 선보이며 IT업계 1세대 벤처창업인으로 여전히 포기를 모르는 벤처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 청년 김장중,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들다
그가 대학교 2학년 시절, 개발한 '21세기'는 초창기 기술적으로 높은 완성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때의 도전을 발판으로 1993년 친구들과 함께 이스트소프트를 창업하게 된다. 현대전자 등 유수의 대기업이 달콤한 제안을 거듭했지만 김 대표는 이를 거절하고 홀로서기를 결정한다. 기존 틀에 얽매이지 말고 더 넓고 큰 곳을 보자는 생각이었다.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를 지향한 이스트소프트는 3000만원의 계약금으로 사업자 등록을 마쳤지만 처음에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21세기'를 바탕으로 추가적인 소프트 웨어 개발에 몰두했으나 생각했던 것처럼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다. 군 제대 후 함 께 회사를 꾸려간 친구들이 차가운 현실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가면서 그에게 남은 것은 이스트소프트라는 이름으로 남은 빚더미 뿐이었다.
그러나 대농그룹에 편입된 한메소프트가 그의 가능성을 보고 손을 내밀면서 이스트소프트는 막강한 자급력을 가진 대기업 품에서 급격한 성장세를 맛본다. 이스트소 프트는 당시 미도파백화점의 포스시스템 오픈 등 SI사업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이름을 알렸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전념하던 20대 김장중 CEO (우측아래) <사진제공 = 이스트소프트> |
특히 업계의 예상과 달리 알집의 무료 배포를 선언하면서 이스트소프트의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수익화에 조급해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본 김 대표의 전략이 통한 셈이다.
◆ CEO 김장중, IT 사업 저변을 확대하다
홀로서기에 나선 김 대표가 처음 게임 사업에 발을 내딛은 것은 2002년 가을이었다. 지금도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를 선택한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의 노하우를 접목시켜 카발 온라인을 개발했다. 이 때부터 그는 모든 소프트웨어는 서로 통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게임이라는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보안과 포털 사업 등 모든 개발 프로그램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수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카발 온라인이 처음 빛을 본 것은 2005년 12월이었다. 잦은 야근으로 개발자들이 병을 얻을 정도로 몰입한 결과, 일본 업체 한 곳과 첫 수출 계약이 이뤄진 것이다. 계약과 함께 50만 달러의 돈이 입금됐고 이를 시작으로 현재는 전세계 60개국 2600만명의 누적 이용자를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는 처음부터 국내 시장에 국한되지 않고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전략을 고수했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 신념을 모든 사업 분야에 접목시켰다. 현재 카발은 중국 시장 선점을 목표로 하고 있고, 2007년에는 일본 법인을 설립해 소프트웨어 사업을 현지에서 직접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실리콘 밸리를 통해 미국 현지 사업도 본격화되고 있다.
<사진제공 = 이스트소프트> |
2003년 개발을 본격화해 2007년 빛을 본 알약은 초기 목표가 500만 사용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달랐다. 출시 후 6개월만에 1000만 사용자를 돌파했다. 이 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는 매출 100억원을 넘기고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또다시 무료 서비스로 승부수를 던진 점이 알약 성공의 발판이 된 것이다.
그는 이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남들이 쉽게 나서지 못하는 포털 사업에 눈을 돌렸다. 2007년 그가 문을 연 줌닷컴은 2013년 4월 검색 점유율 1%를 돌파하며 의미있는 순항을 지속했다. 파란과 야후 등 대형 사업자들이 1%를 넘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고 SK컴즈의 네이트가 검색 사업을 다음에 이관하며 포털 사업을 축소했으나 줌은 여전히 1% 점유율을 유지하며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네이버와 다음카카오 등의 대형 IT업체들을 상대로 생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특히 PC 인터넷 사업에선 스윙브라우저를 통해 의미있는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6월 현재 1000만 다운로드를 돌파한 스윙브라우저는 국내에서 만큼은 구글 크롬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서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 20여년 개발 인생…다방면의 인맥 '눈길'
2009년 당시 이스트소프트의 2대 주주는 KT의 자회사인 KTH였다. KTH가 운영하던 파란닷컴과 이스트소프트의 사업이 겹치면서 양사는 소원한 관계를 지속했다. 이에 김 대표는 다음과 손을 잡고 반전을 꾀했다. 이때 김 대표는 최세훈 다음카카오 공동 대표와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다음은 10% 가까운 이스트소프트 지분을 확보하며 이스트소프트의 우군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이스트소프트의 게임을 다음 포털게임에 올리거나, 이스트소프트의 포털 '줌닷컴'의 광고사업자로 다음을 선택하는 등 두 회사의 사업 협력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다음 기술책임자 출신인 이재혁 사외이사가 이스트소프트에서 중책을 맡으면서 양사의 연결 고리 역할을 자임했다.
이는 다음카카오 합병 이후에도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는 등 최 대표의 개인적인 친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근 들어 다음카카오가 이스트소프트 보유 지분의 절반을 매각하면서 두 대표 관계의 변화 조짐이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는 게임빌·컴투스의 송병준 대표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카발 온라인 개발 이후, 카발2에 이르기까지 게임 사업의 전반적인 부문에 대해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공게임즈의 공두상 대표, 와이즈캣의 남민우 대표와도 긴밀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인터넷 분야에서는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와 각별한 사이다. 특히 1989년 아래하 한글을 개발하는 등 소프트웨어 개발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 대표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울러 옐로모바일의 김현영 이사(CYO)와 다우데이타 정동철 대표,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의 오재철 대표와도 김 대표의 지인 중 하나다.
스타트업 양성 분야에 있어서 국내 최고로 손꼽히는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과도 긴밀한 관계다. 특히 IT 스타트업 분야에 관련해 조언을 주고 받는 등 협력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임 센터장이 라이코스 대표, 다음 글로벌 사업 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오랜 기간 IT 업계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김 대표와 사업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 교류를 나누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김 대표가 마당발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IT CEO로 자리를 지키면서 온화한 성격으로 IT 관계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라며 "특히 보안과 포털, 게임 등 다방면에 사업을 진행해 여러 IT 분야에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점이 인맥의 강점으로 통한다"고 설명했다.
[뉴스핌 Newspim] 이수호 기자 (lsh5998688@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