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일관되게 경영판단 원칙 수용하고 있는지 의문
[뉴스핌=이연춘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상법에 명문화해 달라고 법무부에 건의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영상 판단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배임죄 적용으로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경영자가 기업의 이익에 합치된다는 믿음을 갖고 사안에 대해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면 예측이 빗나가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배임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배임죄 적용은 이같은 고려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부실대출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저축은행회장들이 배임죄 관련 조항에 대해 낸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이 경영판단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헌재가 합헌논거로 제시하고 있는 2002도4229판결부터다.
이 판결의 핵심은 기업경영에는 원천적으로 위험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경영자가 기업의 이익에 합치된다는 믿음 하에 신중하게 결정을 했다면 비록 그 예측이 빗나가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배임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경련이 법원 판결들을 분석한 결과, 경영판단 관련 배임죄 판례는 37건으로 이 중 2002도4229판결을 인용하며 경영판단이 있었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판단한 것은 절반정도인 18건에 불과했다.
또한 37건 중 같은 사안을 두고도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여부에 따라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유·무죄 판단이 엇갈린 판례가 12건이나 됐다.
실제 이 판결 이후에 비슷한 문제를 다른 사건에서 재판부가 일관되게 경영판단 원칙을 수용하고 있지는 의문이다.
일례로, 횡령 및 배임으로 기소된 대한전선 임종욱 전 부회장 사건(2013도7360판결)에 대해 고등법원은 임 부회장이 본인의 이익을 위해 회사 자금을 집행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배임의 고의를 인정하지 않아 배임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경우(2013도5214판결)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김 회장 사건은 경영진이 그룹 내 부실 계열사 구제를 위해 우량 계열사 자산을 동원한 사건으로 1심은 경영상 판단으로 보기 어렵지만 손해발생이 없었으므로 무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2심은 그룹 전체의 구조조정을 위한 행위였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이 합리화될 수 없다는 이유로 경영상 판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동시에 손해발생의 위험도 있었다는 이유로 유죄로 판단했다. 대법원 역시 2심과 동일한 이유로 유죄로 봤다.
뿐만 아니라 앞서 SK증권 유상증자 사건(2005도4640판결) 역시 재판부의 판단이 엇갈린 사례다.
이 사건과 관련,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SK글로벌 해외현지법인 2곳과 JP모건 간에 SK증권 주식에 관한 풋옵션 계약을 체결하도록 한 사건도 무죄에서 유죄로 판단됐다.
이 사건에 대해 1심과 2심은 경영상 판단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배임의 고의를 인정했다. 대법원 역시 배임죄의 고의를 부정할 수 없다며 구체적으로 경영상 판단인지 고려하지 않고 미필적 고의를 인정해 유죄를 인정했다.
1심과 2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올라가면서 '유죄→무죄→유죄'가 엇갈린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박연호 부산저축은행그룹 회장 등이 임직원 친척 명의로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해 213억여원을 대출해준 혐의로 기소당한 사건(2009도14464판결)이다.
이 사건에서 1심은 경영상 판단을 인정하지 않아 유죄로 판단했다. 2심에서는 배임죄의 고의를 인정하는 엄격한 해석을 해야한다는 전제 하에 경영상 판단으로 인정되므로 무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저축은행이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해 골프장 사업을 한 것은 임무위배에 해당되므로 경영상 판단이라 하더라도 배임에 해당해 유죄로 뒤바꿨다.
전경련 측은 "헌재의 합헌취지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배임죄에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며 "기업활동을 다루는 상법에 명문화해 명확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신석훈 전경련 기업정책팀장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헌재의 합헌취지가 일관성 있게 유지되도록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해 기업가정신이 살아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이연춘 기자 (lyc@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