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두 갈래 길로 동시에 간다. 비 온다. 춥다.
유언이라도 쓰고 싶은 충동이, 순간의 자기 연민 속에 스친다. 유언 문구도 떠오르지만, 비애의 허무만 매김하고 지날뿐이다.
오늘은 한국이 부도난 날. IMF에 500억불을 신청하였다. 극한 위기 속에, 억지로 먹는 알약이다. 효과가 있을런지는, 몇 년이고 지켜봐야 한다. 사표 던지고 싶은 치욕마저 사치로, 거품으로 여겨지는 지독한 슬럼프의 세월을, 서럽도록 감내해야 한다. 의욕 잃은 영혼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일터를 떠날 수 없는, 추운 얼음 바닥 떠날 수 없는 병든 펭귄은, 얇은 가죽으로 어떻게 긴 겨울 지내나. 방문하는 업체마다 침체된 영혼들 뿐이다.
차 한 모금 마신다. 글쓰는 것도, 차 한 모금 마시는 것과 같다. 마음 깊히 파고들지 못하고, 표층만 건드린다. 까페의 창유리는 온통 빗물로 덮히고, 찬 바람에 흔들리고, 내 마음 그렇게 흘러간다.
시간 흐른다. 아내에게선 전화가 없다. 조금 전 전화했을 때, 신경질적으로 받고, 어색하게 끊고, 아직, 연락 없다. 요즘 들어 내게 위로를 주는 가끔의 모습들이, 마음이라기보단 의지의 비중이 커 보이는 모습들이, 가슴 아프다.
느껍다. 글로서 평생 살고 싶은, 그리로 가고자 하는 충동이 두렵다.
마약보다 약한 충동, 시간의 화살을 감싸는 비닐봉지 같은 글쓰기가 역겹다.
회사에서 오늘, 명예퇴직하고 싶냐는 설문에, 보자마자 OK 했다. 명퇴 후의 삶이 개런티 안된다. 대안도 없고, 불투명한, 부도 직전의 어음 같은 미래뿐인데, 그 미래에, 나는 나를 토스하려 한다. 가족과 아이들을, 내 불안한 판단에 맡기려 한다.
더 깊이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은 시소처럼, 불안과 망상 사이를 왕복할 뿐이다.
한방이면 나가떨어지는 암담한 미래, 간단명료한 미래가, 군함처럼 총포 내밀고, 내 삶을 점령해 들어오고 있다.
네트 넘어 토스한 배구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휘두른 샌드백이 돌아오지 않는다. 서울랜드 하늘로 날아오르던 주혜의 풍선. 풍선을 놓친 주혜, 울었다. 추운 겨울, 새파란 하늘 아래, 눈물 뚝뚝 떨어뜨렸다. 주혜야, 아빠도, 그 풍선 돌려줄 수 없단다. 증명 못할 세계로 빠져버린 그 풍선, 아빠도 어찌할 수 없단다.
내 손에 쥐었던 풍선들, 다 날아간다. 십년 간 들고 있어 정이 든 회사, 날아간다. 아내마저 날러갈뻔 했다. 빈 손 하늘로 쳐든채 내리지 못하고, 멀어지는 풍선 바라보며, 그 자리에, 얼마나 서 있을지 모를 허무한 무너짐 속에, 마냥 서 있을 뻔했다.
아내의 남자도 지금 그 심정일까. 무슨 말들 오갈까. 빈 손 허공에 둘둘 돌리며, 초점 잃은 눈빛 어디에 맞출지 모른채, 아픈 가슴 짓밟고들 있을까. 연 창을 통해, 비에 젖은 찬 바람 들이찬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어찌해야 하나. 전화 오지 않는다. 어디로 흐를지 모를 전화기 신호음처럼, 두 사람 만나고 있다. 만나서 깨지려 한다. 깨고 싶지 않은 마음과, 깨야 하는 의지. 그 착잡함. 알코올 속의 독처럼 흐를 것이다.